한국과 유네스코의 과학 활동 70년
나라마다, 민족마다, ‘꿈’의 형태와 그것을 이루는 방법은 제각각 다를 것이다. 오랜 식민지 수탈과 참혹한 전쟁을 겪고 황폐화된 국토에서 한국인들이 꾼 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꿈이 무엇이든 가장 먼저 풀어야 할 과제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고, 불과 70년 사이에 우리는 좁은 국토와 많은 인구, 부족한 기반시설이라는 제약을 극복하고 ‘코리안 드림’을 실현했다. 그 과정에서 과학기술 분야가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는 사실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빈 손으로 출발한 우리가 기적을 만드는 열쇠가 되었고, 또다시 눈부신 100년을 그려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과학기술 분야에서 한국과 유네스코가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빈 손’으로 일군 도약의 토대
한국전쟁 직후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 우선 과제였던 우리나라에는 산업 발전의 기초가 될 과학기술 분야의 기반이 거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교육·과학·문화 분야의 국제 협력을 강화해 궁극적으로 세계 평화와 발전을 달성하려는 유네스코의 존재는 큰 힘이었다. 단순히 ‘식량’과 ‘자금’이 아닌, 해당 국가의 지적, 도덕적 역량을 키우는 것을 우선 순위에 두는 국제기구는 유네스코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후 한국의 재건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이 1958년 활동을 끝내면서, 과학기술 분야의 재건을 가장 적극적으로 도운 주체가 바로 유네스코였다.
1950-60년대에 유네스코는 유네스코한국위원회를 통해 해외 과학계의 선진 지식과 동향을 소개하고 외국 과학기술 서적을 국내에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유네스코의 기부 등을 통해 국내 대학 도서관 등에 보급된 해외 과학서적과 학술잡지는 3만여 권에 달했다. 1962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내에 설치된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현 한국과학기술정보원(KISTI)의 전신)는 1300여 종에 달하는 외국 과학기술 정기간행물과 문헌을 수집·분석한 『과학기술문헌 목록집』과 『외국특허 목록 색인』 등을 발간함으로써 한국의 과학도들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 지식을 쌓고 연구를 이어가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학업과 연구 수행을 위한 자료 제공과 더불어 기술 및 시설 원조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유네스코는 과학교육용 실험기재보수센터와 직업기술교육센터 등을 설립하는 데 250만 달러 규모의 원조를 제공했고, 1961년부터는 ‘유네스코 쿠폰’ 제도를 통해 외화가 절대 부족하고 사용이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연구자들이 해외 과학기자재를 구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서적 구입, 국제학회 회비 납부 등, 당시 유네스코 쿠폰으로 지급할 수 있었던 여러 사용처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항목이 바로 과학기자재 구입이었다. 예를 들어 1969년 8월에는 총 쿠폰배정액 38만1279달러 가운데 약 96%에 해당하는 36만6742달러가 과학기자재 구입에 쓰였을 정도였다.
협력과 네트워킹을 통해 국제 과학 무대로
과학기술 분야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외국의 최신 연구 성과와 지식을 받아들여 국내 역량을 키우는 것뿐만 아니라, 해외 연구자들과의 적극적인 교류와 소통 채널을 유지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가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과학분야의 국제 협력과 네트워킹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3면이 바다이며 북쪽으로는 북한과 대치 중인 상황에서, 해양 연구를 통해 국제 협력을 모색하고 해양 자원을 적극 활용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1961년 설립된 한국해양과학위원회(KOC, 현 한국해양학위원회)는 한국을 대표해 유네스코 정부간해양학위원회(UNESCO IOC)에 참여하고 1966년 한국해양학회 창립의 기반을 닦는 한편, 1996년 해양수산부가 창설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한국 해양과학의 산실 역할을 했다. 국내 해양과학자들이 최초로 참가한 국제해양조사 사업인 ‘쿠로시오 해류 합동조사’(1965-1971) 등을 통해 해양과학 분야에서 국제 협력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국제 협력과 네트워킹은 해당 분야의 국내 역량이 커진 1970년대 중반부터 더욱 본격화되었다. 이 기간에 한국은 유네스코의 동남아 지역 과학기술 네트워크 사업에 적극 참여하며 동남아 각국의 과학기술분야 발전에 기여했다. 한국은 1990년대 중반까지 자연과학 사업을 분야별로 지역적 특성에 맞게 운영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발족한 미생물학 네트워크(1975년 설립)와 천연물화학 네트워크(1976년 설립) 등에 참여하며 워크숍과 훈련, 과학자 교류 등의 활동을 펼쳤으며, 1990년대 후반부터는 아시아 물리교육 네트워크(ASPEN) 활동에 참여하고 2001년 아태지역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정보기술에 기초한 물리교육 회의를 개최한 바 있다.
과학을 기반으로 꿈꾸는 지속가능성
60-7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을 시행하고 한국이 고속성장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공업화로 인한 환경오염 문제도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제 개발을 위해 전 국민이 ‘총력전’에 나서던 당시 상황에서 환경보호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 반향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972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환경문제연구협의회’를 개최하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환경 정책 및 교육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대책을 논의한 것은 매우 선구적이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이 협의회는 한국 사회에서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국내에서 다소 위축돼 있던 환경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을 보다 개방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1962년 미국의 해양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을 발간한 이후 서구에서 환경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이후 유엔 및 국제기구와 단체 차원에서 경제개발과 환경보호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유네스코 역시 환경과학 분야에서 다양한 선도적인 사업들을 진행했다. 그 중 ‘인간과 생물권 사업’(Man and the Biosphere Programme, MAB)은 자연환경에 대한 ‘합리적 이용’과 ‘보전’을 함께 강조했다는 점에서 1992년 유엔에서 제안한 ‘지속가능발전’의 핵심 개념을 담은 사업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도 MAB와 관련한 여러 사업을 진행하면서 개발과 보전 사이의 균형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973년부터 1974년까지 번역·완간된 11권의 『MAB 자료집』은 국내에 MAB 사업을 알리는 매개이자 환경문제와 관련한 우수한 연구 자료로서 큰 역할을 했다. 1980년 6월에는 MAB 한국위원회가 설치돼 생물권보전지역 지정을 받기 위한 절차를 밟아 나갔고, 그 결과 1982년 설악산을 필두로 지난해까지 모두 8곳이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한편 한국은 1995년 ‘동북아생물권보전지역 네트워크’(EABRN) 설립을 주도했고, 현재까지 이 네트워크에 신탁기금을 제공하면서 지역협력을 촉진하고 있다.
이처럼 유네스코는 지속가능발전과 생물다양성 보전을 통해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한 인류의 지적 고민이 인류의 미래에 기여할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는 한편, 과학계 내부의 다양성과 공정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도 지속해 왔다. 1998년부터 매년 아프리카와 아랍, 아시아태평양, 유럽, 남미, 북미 등 전 세계 5개 권역에서 빼어난 업적을 남긴 여성 과학자 5명에게 수여하는 로레알-유네스코 여성과학자상을 제정한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이를 통해 유네스코는 여전히 남성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과학계에서 보이지 않는 장벽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전 세계 여성 과학도들을 격려하고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 역시 2002년부터 ‘한국 로레알-유네스코 여성생명과학상’을 제정해 국내 생명과학계의 권위있는 상 중 하나로 인정받으며 새로운 과학계 인재를 발굴하는 성과도 올리고 있다.
과학, 그 너머의 미래를 가꾸기 위해
유네스코의 과학 분야 사업의 목표는 단순히 ‘과학 발전’에 머무르지 않는다. 유네스코는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평화와 인본주의 정신에 입각해 인류의 공익과 평화에 기여하도록 돕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이는 과학 강국으로 올라선 한국이 앞으로도 유네스코와 협력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과학기술과 사회를 함께 다루는 유네스코의 여러 사업들은 앞으로도 한국 과학계가 주시해야 할 분야다.
유네스코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간 협력이나 교류가 부족하던 시기에도 ‘과학기술과 사회’(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STS) 사업을 통해 과학과 사회의 긴밀한 상호 관계,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특성과 상호 영향을 살펴보는 다양한 연구를 진행했고, 이를 통해 양 학문의 간격을 줄이고 바람직한 협력 방안을 제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역시 유네스코가 1950년부터 발간해온 계간지 『Impact of Science on Society』의 한국어판 『과학과 사회』를 1984년 8월부터 1995년까지 발간했으며, 이같은 활동을 통해 자원 고갈, 환경 오염, 기후 변화, 군비 확장 등 현대사회의 문제를 과학기술의 발전과 관련지어 분석하고, 사회적 이슈를 확산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과학기술이 만들어 갈 미래 사회의 모습을 두고 유네스코가 안고 있는 고민은 과학과 사회, 인권, 그리고 윤리와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2000년대 초반 유전자 복제기술을 둘러싸고 벌어진 ‘황우석 사태’나 최근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인공지능 등의 분야에서 볼 수 있듯, 미래의 과학기술을 다룰 때 ‘발전의 속도’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발전의 방향’이다. 유네스코가 지난 1990년대부터 과학기술의 발전과 연관돼 나타나는 윤리적 문제, 특히 생명윤리 사업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유네스코는 1997년에 ‘인간게놈과 인권에 관한 보편선언’을 채택하고 1998년에는 국제생명윤리위원회(IBC)와 세계과학기술윤리위원회(COMEST)를 설치하는 등 인권과 윤리를 바탕으로 과학기술을 다루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이어오고 있다. 한국에서도 그런 흐름에 발맞춰 과학 발전의 방향에 대한 윤리적 원칙을 고민하는 여러 사업들이 추진됐다. 1998년에는 ‘유전자 조작 식품의 안전과 생명윤리에 관한 합의회의’를, 1999년에는 ‘생명 복제기술에 관한 합의회의’를 개최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민 패널 보고서』를 발간했으며, 지난해 12월에는 국제적인 AI 윤리 권고 논의과정에 기여하기 위해 ‘AI 윤리 성찰 포럼’을 개최하기도 했다. 유엔 시스템 내에서 유일하게 윤리를 논의할 수 있는 기구로서, 유네스코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여 오는 2021년 제41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AI 윤리 권고문을 채택할 계획이기도 하다.
과학기술의 윤리적 측면, 그리고 좀 더 나은 인류의 미래를 고민하는 활동으로 기후변화 대응도 빼놓을 수 없다. 유네스코는 오늘날 기후변화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임을 인식하고 이 문제에 대한 성찰적 접근법을 제안해 줄 「기후변화 윤리 원칙 선언」을 2017년 11월에 채택했다. 이 선언은 세계과학기술윤리위원회가 2008년부터 진행한 연구를 바탕으로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안까지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한국 또한 2009년부터 두 차례에 걸쳐 ‘기후변화윤리포럼’을 개최한 데 이어 2010년에는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국제포럼’을 주최하는 등, 다양한 관점에서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의 관계, 기후변화의 윤리적인 문제점과 해결책 등을 논의해 왔다. 이어 2018년에는 「기후변화 윤리 원칙 선언」의 한글판을 배포하고 관련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우리 사회에서 기후변화 대응 활동과 같은 ‘행동하는 윤리’에 대한 논의와 참여를 활성화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지난 70년간 과학분야에서 이어온 유네스코와 한국의 이러한 인연들은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사에 적잖은 족적을 남겼다. 그 사이 한국은 외부의 지원 없이 살기 힘든 최빈국에서 전 세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원조 공여국으로 발돋움했으며, 학문과 기술 영역에서도 세계의 흐름을 선도하고 있다. 우리는 더는 ‘먹고 살기 위한 도구’로서 과학기술을 원조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지만,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원칙을 중심으로 과학을 다루려는 노력은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한국이 이끌어 갈 과학분야의 미래에 유네스코라는 이름이 오랫동안 함께 빛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
[참고자료]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홈페이지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에서 지구촌 나눔의 주역으로』, 2014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교과서 한 권의 기적: 유네스코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꿨나』,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