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혹시 ‘왕사남’ 보셨나요?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무려 천만 관객을 넘어 여전히 극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데요. 역사적 인물을 다룬 콘텐츠가 주목받을 때 종종 그렇듯, 영화 흥행과 함께 단종의 생애를 둘러싼 역사적 사실에 대한 관심도 새삼 높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종의 유배 생활과 죽음, 그리고 그를 도왔던 엄흥도라는 인물의 이야기는 역사적 기록 속에서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요? 유네스코 뉴스레터도 그 부분이 궁금해서 우리가 자랑하는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997년 등재)을 찾아봤습니다. 실록의 방대한 내용이 모두 디지털화되어 한글 국역까지 함께 제공하고 있는 덕분에 그 내용을 찾는 과정은 어렵지 않고 재미있기까지 했어요. 몇 번의 검색으로 손쉽게 되살아난 그 시절 두 사람의 기록. 그 속으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 슬픈 눈의 어린 왕, 단종의 실록 검색 결과는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 ‘노산군(魯山君, 단종이 폐위된 뒤 사용된 이름)’이라는 이름을 검색하면 396건의 결과가 나옵니다. 단종실록을 비롯해 세조실록, 예종실록, 성종실록, 중종실록 등에 걸쳐 있고, 특히 세조실록에 그 숫자가 많아요.
- 흥미로운 점은 단종 재위 기간(1452-1455년)을 기록하고 있는 단종실록에서도 단종을 노산군이라고만 칭한다는 것이에요. 국사편찬위원회의 해제에 따르면, 이는 해당 실록이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 대에 편찬되었고, 따라서 단종실록의 원래 표제가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였기 때문입니다. 노산군은 사후 241년이 지난 숙종 24년(1698년)에야 단종(端宗)으로 정식 추존되었는데요. 이때 노산군일기도 ‘단종대왕실록’으로 표지와 목차 등이 수정되었지만, 각 책의 속표지와 본문은 전체를 다시 쓰지 않는 한 원래대로 남을 수밖에 없었어요. 따라서 자신이 주인공인 단종실록에서도 단종은 여전히 노산군이라는 이름으로만 불리고 있다는 슬픈 사실🥲.
+ ‘의리파 시골 촌장’, 엄흥도의 실록 검색 결과는
- 엄흥도(嚴興道)라는 이름은 실록에 총 41번 나오는데요. 생존 당시였을 단종실록이나 세종실록에서는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고, 사후 60여 년이 지난 중종 11년(1516년) 12월 10일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합니다.
- 여기서 중종은 우승지 신상(申鏛)에게 명을 내려 노산군의 묘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는데요. 영월까지 가서 명을 수행하고 돌아온 신상이 눈물까지 흘리며 중종에게 보고했다는 내용이 실록에 이렇게 남아 있습니다:
“묘는 영월군 서쪽 5리 길 곁에 있는데 높이가 겨우 두 자쯤 되고, 여러 무덤이 곁에 총총했으나 고을 사람들이 군왕의 묘라 부르므로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었고, 사람들 말이 ’당초 돌아갔을 때 온 고을이 황급하였는데, 고을 아전 엄흥도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하며,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애상(哀傷)스럽게 여긴다.”

+ 단종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기록은
-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구성하는 마지막 순간에 대한 묘사들은 대부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비롯한 조선시대 야사(野史)의 기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단종이 사약을 거부하고 (자의든 타의든) 다른 사람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들이 모두 이런 야사 기록에서 비롯된 것이죠. 반면에 당시의 실록(세조 3년(1457년) 10월 21일)에는 세조가 사약을 내렸다는 언급도 없이, 모반 혐의로 이유(李瑜, 금성대군)를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사사(賜死)되었다는 내용과 함께 “노산군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 하지만 후대의 실록 기록을 보면 세조가 사약을 내린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선조 2년(1569년) 5월 21일의 기록에는 “(세조가 노산군에게) 금부도사를 보내어 영월에서 사약하였으니 그 공사(公事)가 지금도 금부(禁府)에 남아 있습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 숙종 25년(1699년) 1월 2일 기록에도 당시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여기서는 숙종의 언급을 통해 단종이 사약을 받는 대신 다른 사람의 손에 목숨을 맡겼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사약을 갖고 온)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고을에 도착하여 머뭇거리면서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 그때 앞에서 늘 모시던 공생(貢生, 과거시험 준비생) 하나가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가, 즉시 아홉 구멍으로 피를 쏟고 죽었다.”

+ 시골 촌장 엄흥도, 충의공까지 오르다
- 세조실록은 “노산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예를 갖춰 장사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 장사라는 게 얼마나 예를 갖춘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요. 물론 정말로 시신을 그냥 강에 버렸는지는 야사나 상상 속 영역이겠지만, 적어도 시신 수습 과정에 엄흥도라는 인물이 관련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 현종 10년(1669년) 1월 5일자 실록에서는 “노산군이 해를 입었을 때 아무도 거두어 돌보지 않았었는데, 그 고을 아전 엄흥도가 곧바로 가 곡하고, 스스로 관곽(棺槨)을 준비해 염하여 장사를 치렀으니, 지금의 노묘(魯墓)가 바로 그 묘입니다”라면서 다시 한번 엄흥도라는 이름을 언급합니다.
- 이후 엄흥도의 이름은 영·정조, 순조, 고종 대에 이르기까지 실록에서 수 차례 언급되면서 충절을 지킨 이로 칭송되었고, 마침내 고종 때에는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 과거의 기록, 오늘의 ‘재미’와 ‘의미’가 되다
- 조선왕조 실록 검색을 통한 영화 속 인물의 기록 살펴보기. 오늘 이야기 어떠셨나요? 실록을 비롯해 정말 다양한 기록을 남기고 또 지켜낸 ‘기록 맛집’ 조선의 노력 덕분에 역사 속 사실들은 새로운 상상력의 토대가 되고, 또 다른 지식과 통찰의 근거가 되어주었는데요. 이는 단순히 기록유산을 보존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의 의미와 가치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 기록의 형태로 보존된 집단적 기억의 훼손을 막고,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 그 기억을 민주화하는 것. 바로 디지털의 시대에도 모든 형태의 기록들이 묻히거나 사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 MoW) 프로그램의 존재 이유이자 미래입니다. 우리가 잘 지킨 과거의 기억이 오늘의 반성과 화해로, 또 새로운 콘텐츠와 성장 동력으로 끊임없이 바뀌는 시대. 우리가 지켜야 할 또 다른 기억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앞으로도 이어질 세계기록유산 소식도 관심과 애정을 갖고 지켜봐 주세요!
<유네스코 뉴스레터> 편집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