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지구의 기온 상승폭을 억제하기 위해 각국이 온실가스 배출량을 관리하기로 합의한 ‘파리협정(Paris Agreement)’이 채택됐다는 소식에 전 세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합니다. 인류가 공멸을 피하기 위해 기꺼이 한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기념비적인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한 환호가 실망으로 바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협약의 성패에 큰 영향을 미치는 미국은 협약 탈퇴를 선언해버렸고, ‘지구 평균 온도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최대 2도 이하로 유지’라는 목표 달성도 사실상 어려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국제 협약이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고 평가절하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미흡하나마 각국은 여전히 ‘목표’를 세우고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이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 높아졌으니까요. 그러니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사무총장을 비롯한 국제기구 인사들이 늘 강조하는 “전 지구적 문제에는 전 지구적 해결책이 필요하다”라는 말은, 아직까진 그 시효가 다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는 지금, 파리협정의 뒤를 잇는 또 하나의 전 지구적 약속을 마련하기 위해 논의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바로 ‘국제 플라스틱 협약(Global Plastics Treaty)’입니다. 온실가스와 마찬가지로 한번 생산되면 사라지지 않고 차곡차곡 쌓여 문제를 일으키는 플라스틱. 이 플라스틱으로부터 환경과 우리 건강을 지키기 위한 또 하나의 간절한 약속을 국제사회는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오늘 뉴스레터는 이 새로운 약속의 진척 상황과 쟁점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This is not a plastic treaty!”
“This is not a treaty!”
지난해 8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플라스틱 협약 제5차 정부간협상 속개회의(INC-5.2)’. 이 자리는 2025년까지로 예정된 협정문 마련을 위한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협약의 내용에 대한 각국의 입장차는 뚜렷했죠. 한 정부 대표단은 “이것은 플라스틱에 관한 협약이 아니다”라는 말로 협약의 범위를 축소시키고자 했고, 의장이 협상 타결 시한에 쫓겨 내놓은 중재안이 공개되자 이번엔 세계자연기금(WWF)의 대표단이 “이것은 조약이라고 할 수 없다”라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결국 회의는 결실 없이 막을 내렸고 두 달 후에는 의장마저 사퇴해 버리면서, 정부간협상위원회(INC)는 올해 2월에 새 의장 및 임원을 선출한 뒤 논의를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새 운영진이 꾸려진 뒤 본격적인 논의는 하반기에나 재개될 것으로 보이는데요. 지금으로선 극적인 반전이 없는 한 올해에도 협의가 마무리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 협약을 가로막는 쟁점들
각국은 2022년 3월 유엔환경총회(UNEA)에서 결의안이 마련된 이후부터 3년에 걸쳐 회의를 이어오며 협약문을 매듭짓기 위한 논의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협약의 가장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사항, 즉 플라스틱 문제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다룰 것인지를 두고 전혀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럽연합과 우리나라를 비롯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100여 개 국가들이 함께하는 ‘우호국 연합(High Ambition Coalition, HAC)’은 플라스틱 제품의 생산과 디자인, 주요 화학 성분까지 포괄하는 ‘생애 전 주기(full lifecycle)’에 대한 관리 방안을 협약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더 늦기 전에 획기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을 시행해야 한다는 입장이지요.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해 플라스틱의 핵심 원료를 생산하는 주요 산유국들은 생각이 다릅니다. 이들 국가는 가뜩이나 전 세계가 화석연료 의존을 줄여나가는 상황에서 플라스틱 생산에 대한 규제까지 더해진다면 자국 경제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협약이 플라스틱 생산이 아니라 플라스틱으로 인한 오염, 즉 폐기물과 재활용 분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세계 최대 산유국이자 소비국인 미국의 입장은 트럼프에서 바이든으로, 다시 트럼프로 행정부 수장이 바뀔 때마다 이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플라스틱의 생애주기 포함 부분과 더불어 협약 이행을 위한 재원 마련 및 집행 방안도 의견이 갈리는 부분입니다. 플라스틱 폐기물의 관리와 재활용 역량에 국가 간 차이가 큰 만큼 저개발 국가들에 대한 기술과 자금 지원이 필요한데요. 특히 온실가스 및 기후변화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전 지구적 플라스틱 오염 문제에 원인을 제공한 바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피해를 가장 직접적으로 받고 있는 소도서개발도상국(Small Island Developing States, SIDS)들은 확실하고 신속하게 기술 및 자금 지원을 보장하는 별도 기금 설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주요 선진국들은 이미 다양한 목적의 환경 분야 기금이 설립돼 있고, 분산된 기금을 따로 관리하는 비용 역시 무시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존 기금을 활용하거나 공공-민간 파트너십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선진국으로 분류되진 않지만 경제 여건이나 기술 측면에서 여력이 있는 국가들, 예컨대 중국이나 중동 산유국들의 공여국 지정 여부도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 실망을 넘어, 미래를 위한 용기가 필요할 때
작년 8월 제네바에서의 마지막 회의가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자 루이스 바야스 발디비에소(Luis Vayas Valdivieso) 의장은 “우리 모두를 위한 목표가 달성되지 못했다는 데 대해 슬프고 힘이 빠진다”면서도 “낙담하는 대신 에너지를 되찾고, 새로 다짐하면서, 우리의 열망을 하나로 모을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의장과 협약 주무 기관인 유엔환경계획(UNEP)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각국의 경제적 이해나 정치 환경에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서는 당사국들의 양보와 타협 의지 없이 협정 문안이 완성되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런 교착 상황을 타개하는 리더십을 발휘하며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수퍼파워’의 힘을 자랑하던 나라들도 이젠 찾아볼 수 없습니다. 유네스코를 비롯한 국제기구들로부터 연이어 탈퇴하면서 다자주의에 대해 거부감을 넘어 경멸까지 내비치는 미국은 중재나 조정에 나설 의사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국제 정치 무대가 오로지 자국의 이익, 오로지 힘과 힘이 맞부딪치는 전장으로 더욱 노골적으로 변해가는 상황에서, 어쩌면 플라스틱 협약의 성안(成案) 여부는 국제사회에서 우리가 여전히 ‘낙담하는 대신 열망을 하나로 모으는 일’을 기대할 수 있을지를 알려줄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예 회의의 의사결정 규칙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끝까지 의견을 하나로 모을 수 없다면, 합의(consensus) 대신 다수결을 통해 협약문을 매듭짓자는 이야기지요. 막대한 폐기물과 더불어 생명체의 몸 속에도 축적되고 있는 미세플라스틱이 실질적인 위협으로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언제까지나 전체 국가가 합의하기를 기다릴 여유가 없다는 이유에서입니다. 하지만 협약의 궁극적인 목적이 ‘채택’이 아니라 ‘실행’에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설령 다수결 투표를 통해 협약이 체결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실행이라는 문턱도 넘을 수 있을지를 염려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10여 년 전, 전 세계 195개국의 합의를 통해 탄생한 파리협정의 현 상황을 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마주하게 될 진짜 난관은 아마도 지금이 아니라 협약 채택 이후에 나타날 텐데요. 대화와 타협, 또 대화와 타협, 그리고 모두에게 다소의 불만족을 남기는 최종 타결. 유네스코의 다자주의 협상 테이블에서 종종 보아 온 대로, 그리고 제네바 회의에 참석했던 덴마크 환경부장관이 AP통신 기자에게 털어놓은 것처럼, 플라스틱 협약도 결국엔 “각국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레드라인’을 조금씩 굽힐 때” 우리가 기다리는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 더 나은 결과를 위한 유네스코만의 역할은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산 꼭대기와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의 밑바닥뿐만 아니라 인간의 몸 속에도 발견되고 있는 플라스틱. 이러한 플라스틱이 무한정 쌓여가는 것을 막을 방법을 서둘러 찾아야 한다는 것을 우린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초등학생들에게 지구를 위한 실천 행동 한 가지를 물어보더라도 어렵지 않게 ‘플라스틱 재활용’이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플라스틱 재활용률은 아직 9% 대에 머물고 있고, 이 수준에서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한 협약은 몇 년째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문제임을 알고 있고, 생활 속 실천 사례를 찾아보는 것도 어렵지 않은 플라스틱 문제에 대해 이토록 인류가 한목소리를 내지도, 충분한 대책을 실행하지도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이러한 대중의 인식과 정책 실현 사이의 간격을 좁혀나가는 일에서부터 우리는 길을 찾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해야만 하는 행동의 정당성을 뒷받침할 충분한 과학적 근거를 찾아 이를 널리 나누는 일. 정치적 논쟁을 넘어 합리적인 합의를 이끌어 낼 도구로서 과학적 데이터를 축적하는 일. 유네스코가 과학 분야, 특히 해양 과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해 온 이 일들은 분명 플라스틱으로부터 지구를 구하고자 하는 협상 테이블에서 좀 더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유엔이 2021년부터 2030년까지로 정한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해양과학 10년’에서도 플라스틱, 특히 육지에서 만들어져 대양으로 흘러드는 플라스틱과 관련한 과학적 연구와 지식을 모으는 일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10년 사업의 주무기관으로서 유네스코는 유네스코 산하 정부간해양학위원회(IOC)를 중심으로 보다 스마트하게, 보다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플라스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데요. AI를 활용해 대양에서의 플라스틱 오염물 밀집 지역을 찾아내는 시스템(ADIS) 구축, 전 세계 생물다양성의 보고이자 대기 중 탄소 저감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해양 지역의 세계자연유산을 플라스틱 오염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유네스코-플라스틱 오디세이 파트너십 등이 그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유네스코는 특히 가장 취약한 국가들의 목소리를 취합해 이를 뒷받침할 과학적 증거를 수집하고, 더 나은 방안을 마련해 글로벌 의제로 격상시키는 데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예컨대 ‘플라스틱 드로우다운(Plastic Drawdown)’과 같은 사업은 기술도, 자금도 부족한 소도서개발도상국(SIDS)들이 플라스틱의 유입 경로를 파악하고 피해 정도와 원인을 분석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사업을 통해 모은 미세플라스틱의 생태적 영향, 플라스틱 생산의 기후 기여도, 그리고 효과적인 폐기물 관리 모델에 대한 과학적 데이터와 각 지역의 목소리들은 향후 플라스틱 협약과 같은 중요한 논의에서 모두의 마음을 움직일 합리적 근거가 되고, 나아가 더 공평하고 지속가능한 타협점을 도출하는 데 기여하게 될 겁니다.
“우리 시대의 현실을 직면할 용기가 있습니까?”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미드웨이 제도에서 알바트로스들의 사체를 찾아다닌 사진가 크리스 조던은 2018년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다큐멘터리 ‘알바트로스’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가장 가까운 육지로부터도 3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이곳에서 죽어간 새끼 알바트로스들의 몸 속에는 어미가 먹이인 줄 알고 먹여준 플라스틱 조각들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요. 알바트로스를 품에 안은 채 그는 우리가 충분히 공감할 준비가 되었을 때, 아름다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슬픔의 바다를 건너 미래를 바꿀 여정”을 떠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올해에도 이어질 플라스틱 협약의 논의 과정에서 인류는 과연 현실을 직면하고 슬픔의 바다를 건널 용기가 남아 있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용기와 양보에 힘을 보태기 위해 유네스코는 과학의 눈으로, 또 공존과 평화를 향한 열망으로, 유네스코만이 할 수 있는 역할들을 이어갈 것입니다.
김보람 <유네스코 뉴스레터> 편집장


UNESCO Ocean Programmes (2025)
오늘 기사, 잘 읽으셨나요? 바다를 이해하는 것이 곧 지구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라는 문제의식 아래, 유네스코 해양과학 프로그램은 플라스틱을 비롯해 해양 환경을 위협하는 요소들과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과학 연구와 국제협력을 이끌고 있습니다.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해양과학 10년(2021-2030)을 중심으로, 유네스코가 바다에서 운영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의 면면과 그 성과를 보고서에서 확인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