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나를 감싸주던 공기와 … 한때 나름 소중했던 것들이 … 사라져가는 것들이 되어 … 흩어져가는 우주의 저 먼지들처럼 다시 만날 수가 없다네”
싱어송라이터 짙은(Zitten)이 쓴 이 노랫말처럼, 우리가 소중하게 여겼던 많은 것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미처 손쓸 틈도 없이 갑자기, 어떤 것들은 조심스런 고양이처럼 시나브로 우리 곁을 떠나고 없죠. 또 어떤 것들은 결국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게 예견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전 세계 바닷속의 산호와 아프리카 대륙에 마지막 남은 빙하 같은 것들이죠.
과학자들은 2040년까지 킬리만자로 산에 있는 아프리카의 마지막 빙하가 모두 녹아버릴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2050년쯤엔 전 세계 산호의 90%가 사라진다는 전망도 있죠. 그리고 이것들은 한때 우리에게 소중했던 존재의 ‘마지막’이 아니라, 우리에게 소중한 또 다른 수많은 존재들이 사라지는 ‘출발점’이 될 거라는 점에서 더 걱정스럽습니다. 당장 우리에겐 멀게 느껴지는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산에서, 그리고 남태평양 외딴 섬에서, 유네스코가 펼치고 있는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께 전하고자 하는 이유예요.
아프리카 대륙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킬리만자로의 빙하, 그리고 이대로라면 금세기 내에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릴 지도 모르는 산호. 이들이 사라지는 것은 단순히 멋진 경관 하나가 사라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곳에 오랫동안 뿌리내린 생태계가 소멸 위기에 처한다는 뜻이고, 그 생태계에 의존해 온 인간의 삶도 온전히 유지되기 힘들다는 뜻이죠. 그래서 유네스코는 올해 ‘세계 빙하 보존의 해(International Year of Glaciers’ Preservation)’의 여러 사업을 책임진 기구로서, 또한 2021년부터 시작해 2030년까지 이어지는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유엔 해양과학 10년(2021-2030)’의 주무 기관으로서 산꼭대기와 바다 밑에서 다양한 연구와 사업들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들 사업은 위험에 처한 지구 환경의 보전뿐만이 아니라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모든 생명체의 적응 및 회복에 이르는 영역까지 아우르면서, 우리가 기후위기를 극복하고 더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어 나가게 해 줄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 킬리만자로의 빙하 — 지키는 것만큼이나 소멸 이후도 대비해야 하는 이유
- ‘하얀 빛’을 잃어가고 있는 킬리만자로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킬리만자로 산은 해발 5,895m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사계절 눈이라고는 만나볼 수 없는 적도 바로 아래(남위 2도)에 위치해 있지만, 높은 고도 덕에 정상은 만년설로 덮여 늘 하얗게 빛나죠. 만년설은 산 아래로 뻗어내려오는 빙하를 통해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낮은 곳으로 흘러들게 됩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킬리만자로의 빙하들은 급격히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는데요. 20여 년간 이곳에서 빙하를 연구해 온 더글라스 하디(Douglas Hardy, 미국 매사추세츠 앰허스트대)는 “1912년 이후 킬리만자로 전체 빙하의 91%가 사라졌다”고 분석하면서, “비록 빙하가 기존의 예측보다는 더 오래 버티고 있는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곳의 빙하는 결국 소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 사라지는 빙하가 제기하는 위협 킬리만자로 산에 인접한 케냐와 탄자니아의 주민 200만 명은 이 산에 직·간접적인 뿌리를 두고 있는 수자원에 식수와 일상을 의존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아무런 변화 없이 꽁꽁 얼어붙은 얼음으로만 보이지만, 빙하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아래로 내려와 녹으면서 내륙 지방의 중요한 ‘물탱크’ 역할을 해 왔습니다. 따라서 이 빙하가 사라진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주변 생태계가 심각한 물 부족 현상을 겪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 부족은 식량 안보 문제와도 직결되고, 나아가 지역의 평화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킬리만자로 산 주변국들은 점점 하얀 빛을 잃어가고 있는 킬리만자로 산 꼭대기를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어요.
- 800만 달러 규모의 킬리만자로 이니셔티브 유네스코는 지난 3월 세계식량기구(FAO)와 파트너십을 맺고 지구환경기금(GEF)의 지원을 받아 킬리만자로 주변 지역의 수자원 및 생물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프로젝트를 발표했습니다. ‘킬리만자로 산 빙하의 소멸을 피할 수 없다’는 과학자들의 전망이 맞는다면 이같은 대책이 너무 뒤늦은 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을 텐데요.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사라져가는 빙하의 보존 노력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좀 더 멀리 바라보는, 그리고 좀 더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하려는 프로젝트라 할 수 있습니다. ▲400km² 규모의 운무림(cloud forest; 열대·아열대 지역의 고고도 지역에서 발견되는 상록산악습윤림)을 복원해 지하수 저장 및 물 보전 능력을 끌어올리고 ▲킬리만자로 일대의 수질과 지하수 수위, 생태계 상태를 모니터링하는 관측 센터를 설립하고 ▲수자원 전문가 200명을 양성하는 등의 프로젝트 내용을 살펴보면, 이 프로젝트가 빙하 보존뿐만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의 ‘적응(adaptation)’ 및 ‘영향 완화(mitigation)’에도 초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이처럼 이번 프로젝트는 유네스코가 단순한 빙하 보존을 넘어 그 주변의 생태계와 인간의 공존을 모색하며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데도 진심인 조직임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 슈퍼맨, 아니 ‘슈퍼 산호’가 주는 희망의 메시지
- 산호, 바다 생태계의 보금자리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특히 자연유산 중에는 산호로 이루어진 군락인 산호초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 적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2,300km에 걸친 경이로운 자연 생태계의 보고인 호주의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1981년 지정)가 있죠. 이곳을 포함해 산호초를 중심으로 구성된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역의 면적은 전 세계에 걸쳐 50만 ㎢에 달하는데요. 전체 해양 생물의 25%가 이러한 산호초를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삼고 있다고 하니, 산호의 건강이 곧 해양 생태계 전체의 건강이라 해도 과장은 아니에요. 우리 인간의 안녕 또한 산호의 건강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산호가 모여 형성된 산호초는 해안을 침식과 폭풍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수많은 지역 사회와 원주민 공동체에 식량과 생계를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인데요. 유네스코에 따르면 산호초가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사회·문화·경제적 가치는 약 1조 달러(한화 약 1360조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 산호에 내려진 시한부 선고 그런데 20세기 이후 지구 온난화로 인해 해수 온도가 꾸준히 상승하면서 산호들은 치명적인 생존의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전 세계 29개소의 산호초 기반 세계유산 중 21곳에서 산호들이 심각한 고온 피해를 입고 있다고 밝혔고, 인류가 탄소 배출량을 대폭 줄이지 못한다면 금세기 말까지 29곳 모두에서 산호가 절멸하고 말 것이라 예측합니다. 최신 데이터에 따르면 고온에서 산호가 새하얗게 변하며 죽어가는 ‘백화현상’은 기존 예측치보다 더욱 빨리 진행되고 있으며, 이는 해수 온도가 일시적으로 내려가는 현상인 ‘라니냐(La Niña)’가 발생하는 기간에도 멈추지 않았다고 해요.
- 하나 둘 발견되는 ‘슈퍼 산호’ 산호가 약 1-2도 정도의 수온 상승에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기 때문에 현재의 추세를 되돌리기 위해서는 강력한 보전 대책을 하루빨리 시행해야 하지만, 이러한 대책을 전 지구적 규모로 바로 시행하는 것은 여러모로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인데요. 이런 상황에서 지난 4월 22일 유네스코가 발표한 ‘슈퍼 산호’ 관련 뉴스는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만 했습니다. ‘회복력 있는 산호초 이니셔티브(Resilient Reefs Initiative, RRI)’를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산호초 생태계 및 자연유산 주변 공동체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모색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는 유네스코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대학(UPF) 등과 협력해 기후변화 압력에 대한 산호의 회복력 관련 연구를 수행해 왔는데요. 이번에 연구진은 남태평양의 타히티에서 1,000km 이상 떨어진 ‘타타코토 환초(Tatakoto atoll)’에서 고온의 환경에서도 잘 견디는 산호를 발견했습니다. 이 지역의 바다는 수온이 섭씨 35도에 달하고 수온 변화 폭도 하루에 3-4도에 이르는 등, 기존의 상식으로는 절대 산호의 서식에 유리한 장소가 아닌데요. 연구진은 이곳에서 온도 변화에 상대적으로 강한 종(Pocillopora)이 아니라 온도 변화에 취약한 종(Acropora)이 오히려 높은 회복력을 보인 것을 확인했고, 향후 그중 일부를 타히티의 무레아 섬으로 옮겨 서식 양상을 확인해 볼 예정이에요.
- 스스로 회복의 길을 찾는 자연 사실 연구진이 이토록 외딴 곳의 극단적인 환경 속에서 ‘슈퍼 산호’를 찾아나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미 이전부터 세계 여러 곳에서 고온에 저항성을 갖는 산호들이 하나둘 발견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홍해의 아카바 만(Gulf of Aqaba)에서는 2015-2019년 사이에 나타난 30도 이상의 고온 해류를 견뎌낸 산호가 발견된 바 있고, 아직 해양 온난화의 영향권 밖에 있는 30-60미터 깊이의 바닷속에 서식하는 산호 중에서도 온도 변화 저항 능력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접하면 어쩌면 자연은 우리 인간이 제대로 된 행동에 나서기를 기다리는 대신 이미 나름의 방법으로 회복을 모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자연이 가진 그러한 엄청난 회복력의 근원은 다름 아닌 생물 다양성이죠. 하늘의 별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인류의 역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오랜 기간 동안 이 지구를 아름답게 수놓아 온 생태계가 위기 극복을 위해 지금 꼭 필요한 것 한 가지를 꼽는다면, 그것은 바로 ‘시간’일 거예요. 그리고 탄소 배출을 최대한 줄이려는 노력, 지속가능발전목표를 최대한 달성하려는 노력은 자연에 이러한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무일 겁니다. 오늘도 아프리카의 산꼭대기와 태평양의 바다 밑에서 유네스코가 찾아내고 있는 새로운 지식들은, 어쩌면 자연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간만 벌어주면 우리가 다 할게’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닐까요?
<유네스코 뉴스레터> 편집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