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
눈에 번쩍 띄는 이 말은 인터넷 공간에서 한국의 저출생 문제를 다룰 때 종종 볼 수 있는 발언인데요. 초저출생 문제를 다룬 EBS 다큐멘터리에서 한국의 출산율 현황을 본 조앤 윌리엄스 미 캘리포니아대 명예교수가 한 말입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한국의 합계출산율 예측치는 0.68명. 인공지능의 계산에 따르면 이는 성비 1대1의 가임기 남녀 100명으로 이루어진 인구집단의 손자 세대의 수가 단 11.56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충격적인 숫자를 마주한 정부와 전문가들은 각기 대책을 내놓고는 있지만 어느 것 하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몇몇 자극적인 영상들처럼 대한민국은 이대로 소멸을 맞이하게 되는 걸까요? 아니면 늘 그래왔듯, 우리는 여기에도 적응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나갈 수 있을까요? 아이 낳아 기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 이 추세를 반전시키든, 적은 수의 사람으로도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이 추세에 적응하든, 바로 지금 무언가를 바꾸어 미래를 대비해야 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이슈쿠키 돋보기 🔍 I 잠깐! 저출생과 저출산, 먼저 짚고 넘어가요
지난 6월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을 발표했습니다. 이를 전하는 언론 기사에서도, 다른 여러 영상과 글에서도, ‘저출산’과 ‘저출생’이란 용어가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는데요. 두 용어는 동일한 의미일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두 용어는 분명히 다릅니다. ‘출산’은 ‘(여성이) 아이를 낳는다’는 뜻이고, ‘출생’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다’는 뜻이니까요. 따라서 저출산이란 여성의 출산율, 특히 여성 한 명이 가임기간(15-49살)에 낳을 것으로 예상하는 평균 출생아 수를 나타내는 ‘합계출산율(total fertility rate)’이 낮은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반면에 저출생은 ‘조출생률(crude birth rate)’, 즉 인구 1천명당 새로 태어난 아기의 수와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인구 대비 신생아가 너무 적다는 뜻이죠. 참고로 2022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8명, 조출생률은 4.9명이었습니다.
아이는 여성만 낳을 수 있으니 결국 이 둘은 같은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출생률은 당연히 출산율의 영향을 받지만, 전체 인구 대비 신생아의 수를 말하는 것인 만큼 고령화나 전쟁, 질병과 같이 모집단의 크기나 구성을 변화시키는 요소로부터도 영향을 받습니다. 출산율 변화가 가임기 여성에게 달렸다면 출생율을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사회 전체의 움직임인 것이죠. 때문에 최근에는 저출산 대신 저출생을 언급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인구감소의 책임이 ‘아이를 적게 낳는 여성’에게 있는 게 아니라 ‘출생인구가 줄어들게 만드는 사회 전체’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지요. 단, 그렇다고 해서 저출산이라는 용어를 쓰는 게 차별적이라거나 틀렸다는 뜻은 아니에요. 각기 다른 내용을 설명하는 용어라는 점을 알고,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따라 정확하게 알고 쓰는 것이 중요해요.
+ 각양각색 좌충우돌, 저출생 대책
저출생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건 단지 우리나라만은 아닙니다. 일본과 대만은 우리나라와 함께 전 세계에서 합계출산율이 가장 낮은 국가들로 꼽히고, 북미와 서유럽 선진국들도 오랫동안 이 문제를 고민해 왔습니다. 이미 1970년대부터 대책을 시행해 온 나라도 많습니다. 이들 국가가 저출생 추세를 반전시키기 위해 내놓은 대책은 정말 다양한데요. 서유럽과 북유럽 선진국들처럼 넉넉한 기간 동안 충분한 급여를 제공하는 휴직 제도와 강력한 공공 교육·보육 시스템을 구축하기도 했고, 점점 높아지는 산모의 연령을 고려해 각종 의료 지원을 대폭 늘리기도 했습니다. 출산 장려금이나 자녀 양육비 지급 등 다양한 형태로 현금을 쏟아부어 보기도 했는데요. 심지어 OECD 회원국 중 우리나라 다음으로 출산율이 낮은 이탈리아는 자녀가 2명 이상인 가정에 아예 세금을 물리지 않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해서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복지나 경제적 지원이 통하지 않을 땐 애국심과 국가주의에 호소하기도 하는데요. 오는 11월에 열릴 미 대선에 트럼프 전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 출마한 상원의원 J.D. 밴스는 “아이를 낳지 않은 미국인은 이 나라의 미래에 아무런 실질적인 기여를 하지 못한 자들”이라는 과거 발언이 알려지면서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특히 “자녀 없는 ‘캣맘’들이 이 나라를 자기네 끔찍한 삶과 똑같이 끔찍하게 만들려 한다”는 그의 발언은 최근 미국 몇몇 주에서 확대되고 있는 낙태금지법안 문제와 연결되며 경제 및 이민 문제와 함께 이번 대선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상태입니다.
+ 저출산 대책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
여러 국가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면서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각국이 저마다 절박한 심정으로 이 문제를 다루어 왔다는 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대책도 떨어진 합계출산율을 현재의 인구 규모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인 ‘2명’ 이상으로 되돌려 놓지는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2022년 기준으로 북미와 OECD의 평균치는 각각 1.64와 1.59이고, 선진국 중 가장 높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는 프랑스는 1.79였습니다. 이들 국가들의 출산율 역시 연도별 부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낮아지는 추세입니다.
한번 떨어진 출산율을 되돌리는 일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미국의 인터넷 언론매체 복스(Vox)의 가족·직업·교육 분야 선임기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애나 노스(Anna North)는 세계 각국의 저출생 문제를 다룬 2023년 11월 27일자 기사에서 “여러모로 볼 때 출산율 하락 추세는 곧 성공의 증거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젊은층, 특히 여성들이 이전보다 더 많은 자유와 삶의 선택지를 갖게 된 결과가 출산율 하락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말을 ‘아이를 낳는 것은 실패’라는 뜻이라 오해할 필요는 결코 없습니다. 단지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이 오늘날 선진국 시민들에게 더는 유일하거나 일반적인 삶의 궤적이 아니며, 그 어떤 정책도 이러한 인식을 쉽게 바꿀 순 없다는 뜻이니까요. 빵빵한 출산 장려금과 너그러운 출산휴가, 그리고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뜨거운 마음이요? 어쩌면 ‘모든 시민이 경제적 여건이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해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이라 가정하고 대책을 내놓기보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시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과 사회란 과연 어떤 모습인지를 파악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양한 삶과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모두 응원하고 지원하는 세상을 만들 수만 있다면, 그 위에서 다양하게 꽃피울 수많은 삶의 모습 중엔 아이와 함께하는 삶도 반드시 있을 테니까요.
+ 모두의 다양하고 행복한 삶이 가져올 나비효과
“그러니 우리가 투자해야 할 대상은 (출산율 자체가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들과 그들 각각의 성공입니다.”
앞서 소개한 애나 노스의 기사에서 앨리슨 겜밀(Alison Gemmill) 미 존스홉킨스대 교수가 한 말입니다. 어떤 형태의 삶도, 어떤 형태의 가족이라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만들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고 그중 일부가—혹은 점점 더 많은 수가—아이와 함께하는 선택을 주저하지 않고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저출생 해결의 현실적인 출발점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지난 8월 8일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와 함께 개최한 유네스코 토크의 주제인 ‘저출생 시대, 현실적 유토피아 상상하기’와도 딱 맞아떨어지는 말입니다. 이 토크를 통해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단지 출산율 향상만을 고민하기에 앞서, 육아하는 삶을 응원하고 존중하며 그 선택이 혼자만의 짐이 아니라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저출생 해결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책임을 생각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한 진미정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와 김희삼 광주과학기술원(GIST) 교수, 정지우 작가 겸 문화평론가도 각자의 시각에서 이를 뒷받침했는데요. 예를 들어 “다름을 인정하고 취향과 가치를 구분해야 한다”, “내 선택과 상관 없이 다른 사람들의 선택을 존중해 주는 사회를, 돌봄을 응원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진미정 교수의 말을 듣고 나면, 우리가 응원하고 지원해야 할 대상은 출산 그 자체가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선택과 성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돈 몇 푼 쥐어주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육아하는 삶을 배제하지 말고 초대해야 해요. 육아하는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시그널을 전 사회가 주어야 합니다” – 정지우 작가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야 해요. 개인은 지속가능한 행복의 원천을 공부하고 실천해야 하고, 사회는 개인이 각자의 상상을 바꾸는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 김희삼 교수
모두가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응원하자는 게 어떻게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냐고요? 하지만 지난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북유럽 국가들에서 일어났던 ‘깜짝 출산율 반전 스토리’를 살펴본다면, 이 사회가 각자의 삶의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하는 바탕을 마련해 두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놀라운 일을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습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의 기사에 따르면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에 미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출산율이 급락했지만 북유럽 5개국(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아이슬란드)에서는 적게는 1%(스웨덴)에서 많게는 16.5%(아이슬란드, 2분기)까지 출산율이 높아졌다고 하는데요. 불황이나 경제위기 등의 상황에서 출산율 하락이 발생하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라는 점에서 이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 상세한 원인과 결과를 알아내기 위해 여전히 다양한 분석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요. 먼저 눈에 띄는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출산휴가에서부터 급여 보장, 공공 교육 및 보육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갖춰진 시스템입니다. 하지만 유럽 최고의 합계출산율을 자랑하는 프랑스를 비롯해 다른 서유럽 선진국들도 이러한 시스템은 잘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전문가들은 이들 국가만의 ‘플러스 알파’도 있을 것이라 조심스레 예측하고 있습니다. 정책 시행의 속도와 타이밍,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굳건한 신뢰 등이 거론되는 가운데, 정확한 결론은 좀 더 시간이 흘러야 알 수 있을 것이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해당 기간에 새로 아이를 낳은 커플들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그들의 생각과 말 속에서 저출생으로 고민하는 우리 사회가 애타게 찾는 해답, 각자의 삶을 응원하고 뒷받침하는 유토피아의 현실적인 가능성을 분명 엿볼 수 있습니다.
2020년 봄, 남편과 함께 세 번째 아이를 갖기로 결정해 2021년 3월에 쌍둥이를 낳은 아이슬란드의 분자생물학 박사인 그뷔드뮌즈도티르(Guðmundsdóttir)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십대 딸들과 함께 집에 머무르면서 함께 밥을 만들어 먹고, 온갖 이야기들을 하며 웃고 떠들고, 팬데믹이 아니었으면 십대 아이들과 결코 같이 할 수 없었을 일들을 하며 ‘내가 아직도 엄마가 되는 일과 작별하고 싶어하지 않는구나’라고 느꼈죠.”
핀란드의 발라렌(Vallarén) 씨도 이야기합니다.
“원래 우린 몇 년 뒤쯤 아이를 갖기로 했었는데요. 락다운이 걸리고 모든 여행이 취소되고 남편과 집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나중보다는 지금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들의 말을 보면 북유럽 시민들에게 출산과 육아는 단지 자신의 꿈과 행복의 한 형태를 선택하는 것이지, 대단한 각오와 희생을 강요하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출산과 육아의 기회비용이 그렇지 않았을 경우의 기회비용보다 특별히 크거나 작지도 않고, 따라서 아이를 갖는 결정이나 갖지 않을 결정을 뒤바꾸는 일도 그저 내 삶과 행복을 위한 자연스럽고 평범한 결정 중에 하나로 보입니다. 출산과 육아는 짐이 아니고, 숙제가 아니고, 빚은 더더욱 아니게 만드는 시스템과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분위기. 내가 내리는 선택이 내 인생에 위협이 아니라 가능성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더 나아가 아이와 함께하는 나의 하루가 이 세상으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 그들의 ‘평범한 결정’ 뒤에는 자신이 몸담은 사회에 대한 이러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고, 이러한 믿음은 보조금이나 휴가, 애국심, 혹은 그 모든 것의 조합으로 하루아침에 쌓을 수 있는 건 결코 아닐 겁니다.
저출생과 이로 인한 국가소멸을 걱정하는 우리 사회는 지금 공존과 관계, 행복, 돌봄과 포용이 있는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있나요? ‘K-육아’가 나를 갈아넣는 최고난도의 도전과제가 아니라, 오롯이 내 삶과 행복을 위한 지극히 평범한 선택 중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나요? 우리 사회가 그 변화를 위한 첫발을 내딛었음을 모두가 느낄 수 있을 때,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이 존중받고 응원받고 든든히 뒷받침될 수 있다는 걸 누구나 확신할 수 있을 때, ‘K-육아’는 더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고 선망하는 멋진 삶의 한 갈래가 분명 될 수 있을 거예요.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