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역량강화 워크숍 개최 후기
‘En Afrique, quand un vieillard meurt, c’est une bibliothèque qui brûle.’
‘아프리카에서 한 노인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
아프리카의 검은 지성이라 불리는 말리 출신의 작가 아마두 함파테 바(Amadou Hampâté Bâ)가 1962년 유네스코 회의에서 남긴 말이다. 이 짧은 문장은 그 자체로 아프리카 대륙이 지닌 구전의 중요성과 고유한 지혜를 품고 있는 노인들의 가치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는 종종 글로 남겨지지 않고 세대를 거쳐 구전으로 전해 내려왔다. 그들의 기억과 경험, 지혜는 그 자체로 방대한 도서관이었다. 그러므로 한 노인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그들이 쌓아온 지식과 이야기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의미한다. 아마두 함파테 바는 그 기억이 잊히지 않도록 아프리카의 다양한 목소리를 수집하여 기록하였고,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근무하면서 잊혀 가는 아프리카 전통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가교 역할을 정력적으로 수행했다.
코트디부아르의 아마두 함파테 바 재단(Fondation Amadou Hampâté Bâ)은 전 세계가 그가 추구했던 가치를 기억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미발행 원고 등의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하고자 추진 중이다. 그가 평생을 걸고 지켜내려 했던 아프리카의 소리와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전 세계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인류의 기억’으로 자리잡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신청서를 작성하며 해당 유산이 ‘세계적 중요성(World Significance)’, ‘진정성(Authenticity)’, ‘완전성(Integrity)’ 등의 기준을 충족한다는 것을 설득해내는 큰 관문이 남아있다.
하나의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 위해서는 꽤나 길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2년에 한 번씩 각국으로부터 접수된 등재신청서는 등재소위원회(Register Sub-Committee)에서 등재 적격 여부를 검토한 후, 국제자문위원회(International Advisory Committee)의 최종 심사를 거친 뒤 유네스코 집행이사회에서 등재 여부가 결정된다. 뛰어난 기록물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만큼이나, 설득력 있는 등재신청서를 쓸 수 있는 시간과 자원의 여유를 얼마나 갖고 있는지가 기록유산 등재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현재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496건 중 아프리카의 기록물이 단 35건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러한 불평등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아프리카는 이 세상에 그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려주지 못하고 있다.
세계기록유산 역량이 부족한 국가로서는 기록물이나 등재신청서의 제목을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조차 막막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간직한 유산이 모든 인류에게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2009년부터 ‘세계기록유산 역량강화 워크숍’을 개최해 유산 과소등재국들의 목소리가 세계기록유산으로 잘 남겨질 수 있도록 작은 다리를 놓는 역할을 자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등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기록물을 보유한 국가들을 선발하고,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실질적으로 관여하는 전문가를 워크숍에 초청하여 ‘설득력 있는 등재신청서’를 작성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올해 워크숍은 유네스코가 세계적 우선 순위(Global Priorities)로 삼고 있는 아프리카와 성평등(Gender Equality)에 맞추어 7년 만에 아프리카 지역 국가를 대상으로 가나의 수도인 아크라에서 개최되었다. 아프리카 각국의 기록유산을 발굴하고 그 가치를 세계에 알리기 위한 이번 워크숍에서 우리는 아프리카 대륙이 기록유산 보전에 대해 갖고 있는 열정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50여 개국에 초청장을 보냈을 때 무려 35개의 기관이 참가를 희망했다. 결국 11개국만이 선정되었지만, 그러한 열정은 우리의 마음을 울렸다. 그들은 아프리카의 기록물이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넘어서 전 인류가 함께 기억해야 할 가치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식민 지배와 노예 무역이라는 아프리카의 아픈 역사는 워크숍 참가자들이 소개한 기록물에도 여실히 담겨 있었다. 19세기 세네갈의 노예 무역 명부, 가나의 독립운동가 콰메 은크루마의 연설 녹음본, 그리고 튀니지의 여성 인권 보장을 위한 법률 기록 등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그들이 겪은 고통과 투쟁, 그리고 고난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인간 존엄성에 대한 증거들이다. 이 기록들은 아프리카의 목소리가 잊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그들의 이야기가 지금 이 순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참가자들은 3박4일의 일정 동안 기록유산 심사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으며 더 설득력 있는 등재신청서를 만들기 위해 식사 시간을 넘겨서도 수정 작업에 몰두하였다. 인천에서 가는 것만큼이나 아프리카 각지에서 가나 아크라로 오는 길은 복잡하고 피곤했을 터인데도, 참가자들은 오히려 우리 실무자들을 먼저 걱정해주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자리를 만들어줘서 정말 고맙다”는 그들의 감사 인사를 들을 때면 행사를 준비하며 겪었던 힘든 기억들이 모두 해소되는 것만 같았다.
공식 일정의 마지막 날은 가나 내 기록물 관리 기관 및 국립박물관 답사로 마무리하였다. 가나 대학 내에 위치한 도서관, 아카이브, 디지털 센터 등의 기관에서 자료의 보존 및 전승을 위해 스캔, 촬영, 녹취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 중인 디지털화 작업을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각 기관의 연구자들이 가나의 역사를 후대에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기울이고 있는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이번 워크숍이 아프리카 내 세계기록유산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기록물 담당자 간의 인적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으리라 믿는다. ‘아프리카의 도서관’들이 더는 사라져 없어지지 않고, 모든 인류가 공동으로 간직할 기억으로 오롯이 자리잡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국제협력사업실 김지오 전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