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이란 무엇일까요? 사전에서는 ‘어떤 대상을 연구하거나 배우거나 또는 실천을 통해 얻은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라 말하고 있습니다. 정답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문제에 대한 옳은 답’입니다. 이 두 풀이를 조합해 볼 때, 오늘날의 과학은 우리 인류가 갖고 있는 가장 정확하고 효과적인 지식과 정답의 원천 중 하나입니다. 실험과 실험, 수정과 재수정, 논증과 반증을 거치면서 차곡차곡 쌓여온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우리는 기후위기를 비롯한 크고 작은 도전과제에 대한 답을 도출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미래의 경로를 안내해 줄 수 있는 과학적 지식이란 반드시 ‘최신’의 지식이어야만 하는 걸까요? 오래 전부터 인류 사회 곳곳에서 전달돼 온 지식 속에서 오늘날의 도전과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란 어려운 일일까요? 갑자기 ‘라떼는 말이야’를 시작하려는 건 아니니 오해하진 마세요. 단지 아주 오래 전 이 땅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의 토착지식과 문화가, 21세기의 인류에게도 유용한 정답을 품고 있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유네스코가 귀띔해 드리고자 하는 것뿐이니까요.
‘불에는 불’에 담긴 통찰
과학, 혹은 문명의 이름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고,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금지’의 주홍글씨가 찍힌 토착 문화 중 하나로 산이나 경작지에 일부러 불을 내는 풍습을 들 수 있습니다. 정월대보름을 맞아 불놀이를 하면서 들녘에 불을 놓는 우리의 쥐불놀이와 같은 전통은 세계 곳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요. 유네스코에 따르면 이와 같은 인위적 불놓기 문화는 천 년 넘게 이어져 온 대표적인 풍습이자 토착지식 중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지구 반대편, 남미 가이아나 실드(Guyana Shield; 가이아나와 수리남, 브라질 및 베네수엘라 일부 지역을 아우르는 아마존 북동부 지역) 지역에서도 토착민들은 매년 적절한 시기에 바싹 마른 들판을 태웠습니다. 토질을 개선하고, 울창한 삼림으로 옮겨붙을 수 있는 큰불의 불씨가 될 원인을 미리 제거한다는 목적에서입니다.
북미 요세미티 지역에서도 아메리칸 원주민들이 정기적으로 산에 불을 놓았습니다. 2023년 미 UC버클리대 연구진은 불놓기와 관련된 원주민들의 구전 등을 검토해 본 결과 “원주민이 번성하던 당시 클래머스(Klamath) 산맥 일대의 바이오매스(biomass; 생물 유기체 총량)는 오늘날의 약 절반 수준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연구진은 이것이 주 정부가 불놓기를 금지시킨 뒤 자연 생태계가 더욱 번성했다는 뜻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숲 전체가 대규모 산불이나 해충에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고도 분석했습니다. 한정된 면적 안에서 나무들 간 경쟁이 심화되면서 몇몇 키가 큰 수종만이 숲을 빽빽하게 채우게 되었고, 그 결과 한번 불이 붙으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한편, 특정 해충에도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커졌다는 뜻입니다. 연구진은 1872년과 2020년 요세미티의 같은 장소를 찍은 사진을 비교하면서 당시의 삼림이 지금만큼 빽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 지역의 아메리칸 원주민 부족인 노스 포크 모노(North Fork Mono)족의 구드(Goode) 족장도 “예전에 나무그늘로 덮인 면적은 지금보다 40% 이상 작았다”고 말합니다. 그때의 숲속엔 하늘이 열린 공간이 지금보다 더 많았고, 이곳에서 더 작은 나무들과 풀들이 다양하게 자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구드 족장은 오히려 숲을 구성하는 나무의 종류가 예전보다 줄어든 현재의 숲을 보면서 “누가 정원을 이런 식으로 가꾼답니까?”라고 되묻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이상고온과 가뭄 등의 기후변화로 인해 2000년대 들어 미 서부 지역에서만 초대형 산불이 연이어 발생해 막대한 인명피해를 내면서, 캘리포니아에서는 토착지식과 지역 사회를 기반으로 한 지속가능한 화재 관리 방식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오래된 지식에 대한 새로운 시선
‘좋은 불’(인위적으로 통제된 불놓기)로써 ‘나쁜 불’(대규모 산불)을 다스릴 수 있다는 이 오래된 지식이 터부시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연히 인간, 특히 요세미티의 숲만큼이나 빽빽하게 모여 살고 있는 오늘날의 인간 사회에 화재가 그만큼 무서운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도시화가 진행되어 많은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면서 화재 예방은 안전한 삶을 위한 필수 요소가 되었고, 대부분의 정부는 통제되지 않은 그 어떤 불씨도 허용하지 않는 것(zero-fire policy)을 가장 기본적인 화재 예방 대책으로 삼았습니다. 문제는 작은 불로도 큰 인명피해를 낼 수 있는 도시에서 효과를 볼 수 있는 이러한 정책이 전혀 다른 문화와 삶의 방식을 가진 지역, 특히 유구한 세월 동안 자연과 공존하며 살아 온 토착민들의 문화에서도 같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정책인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성찰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다양성, 혹은 토착지식의 가치에 대한 특별한 고민 없이 이들의 문화는 더는 중요하지 않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폄하됐고, 유구한 세월 동안 쌓인 토착지식을 기반으로 한 불놓기 풍습을 방화 또는 실화(失火)와 구분하지도 않았습니다. 1850년, 당시 미국의 새로운 주로 편입된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아메리칸 원주민들의 불놓기를 법으로 금지시켰고, 삼림 당국은 고의로 불을 놓는 이들을 사살하라는 권고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불놓기 풍습이 현대 과학이 미처 보지 못한 부분까지 내다보고 있는 유일무이한 정답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전통이나 문화라는 이유로 그 어떤 행위나 지식이 무제한 허용돼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통제되지 않은 모든 불씨는 나쁜 것’이라는 도시 위주의 사고방식을 세상 모든 지역에 획일적으로 적용할 때도 기대만큼의 효과를 내는지, 생태계와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은 무엇인지, 나아가 엄밀한 과학적 검증이 불가능한 토착지식을 그저 구습으로 치부하는 것이 성급한 일은 아닌지를 좀 더 면밀하게 따져보는 것은 ‘21세기적 지식’을 갈구하는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일입니다. 조지 니콜라스(George Nicholas) 사이먼 프레이저대 고고학과 교수는 2018년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에 실린 기사에서 앎의 한 방식으로서 토착지식과 ‘과학적’이라고 부르는 오늘날의 지식은 “반복과 검증, 추론과 예측, 경험적 관찰과 패턴의 인식을 통해 끊임없이 검증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속성을 공유한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동안 앎의 방식으로서 토착지식과 현대적 지식 사이의 공통점보다는 토착지식이 미처 갖추지 못한 부분만을 바라봤던 건 아니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로도 읽힙니다. 니콜라스 교수가 강조했듯, “전통적인 지식 기반 정보에서 도출한 가설이 예상치 못한 통찰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점에서” 토착지식은 오늘날의 지식 발전에 분명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앎의 방식’을 연결할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
문화적 혹은 과학적 측면에서 이러한 토착지식에 관심을 갖고 이를 보전하는 것을 넘어, 오늘날 인류의 도전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통찰을 토착지식에서 찾기 위해 노력하는 국제기구가 바로 유네스코입니다. 기후위기와 불평등 심화를 비롯한 다양한 미래 문제에 올바르게 대처하기 위해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야만 하는 오늘날, 지난 수천 년간 세계의 모든 곳에서 경험하고, 관찰하고, 인간 및 생태계와 교류하며 쌓아 온 인류의 다양한 ‘앎의 방식’을 구석에 방치해 두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토착민 인구와 함께 이러한 앎의 방식이 영원히 유실되어 버리도록 내버려두어야 할 이유 또한 없습니다. 대단히 다양한 시각,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오랜 기간 쌓아 온 앎의 방식을 한 데 모으고 서로 연결(link)지을 때, 지금 우리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도전과제들에 대한 정답을 찾아낼 가능성도 한층 더 높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난 2002년, 토착지식의 보전과 연구를 위해 유네스코가 마련한 프로그램의 약자가 LINKS(Local and Indigenous Knowledge Systems)인 것은 어쩌면 절묘한 우연이자, 토착지식과 오늘날의 지식 간 연결이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운명적인 명명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가치 있는 지식은 한 곳에 머물러선 안 됩니다. 더 널리 퍼지고, 스스로 움직여 새로운 발견을 향한 다리를 놓고, 나아가 더 나은 행동과 연대를 이끌어 내는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토착지식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향유하는 토착민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토착지식 보존과 연구, 새로운 지식 창조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LINKS의 활동은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세계유산이나 기록유산, 생물권보전지역 등의 사업에서 보여준 비전과 마찬가지로 토착지식에 대한 유네스코의 관심은 그저 ‘옛 것 지킴이’ 수준을 한참 넘어섭니다. 대신 지적재산권 문제에서부터 생물다양성, 자연재해 예방, 식량 안보, 기후변화 경감 및 적응에 이르기까지 과학과 정책과 사회 전반에서 토착지식이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이 유네스코가 토착지식에 관심을 두는 목적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쌓아온 앎의 방식과 오늘날의 앎의 방식을 연결하는 접점들이 점점 많아지고 활성화될 때, 어쩌면 우리는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해답이 이미 우리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