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9호] 기고
2015년 7월 5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이 등재 신청한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군’의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하면서 몇 가지 권고사항을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큰 논란이 되었듯 이 유산군에는 조선인 강제노동과 착취의 한이 서려 있는 ‘군함도’(일본명 하시마)가 포함돼 있다. 위원회의 권고사항 제4항 g호는 한국에서 문제 제기한 강제노동 사안을 위원회가 받아들여 일본 정부가 해당 유산의 ‘전체 역사’(full history)를 관람객이 이해하도록 조처를 취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일 총회 석상에 참가한 일본의 사토 구니 대표 역시 위원회의 권고를 충실히 이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2년 5개월 뒤인 지난해 12월 1일, 일본 정부는 위원회의 권고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계획을 밝히는 ‘보전상황 보고서’를 위원회에 제출하고 일반에 공개했다. 하지만 이 보고서를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일본의 보전상황 보고서는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준비한 보고서치고는 알맹이가 없다. 총 849쪽에 이르는 보고서지만 본문은 58쪽이고, 부록이 790쪽에 달한다. 이 중 문제가 되는 ‘전체 역사’에 관한 부분은 본문과 부록 모두 20여 쪽. 물론 양으로 따질 일은 아니지만, 형식적인 구성만 보더라도 강제노동을 포함한 ‘전체 역사’에 관한 부분이 매우 적음을 알 수 있다. 보고서를 읽어보아도 ‘전체 역사’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기본 구상조차 잘 알 수 없다. 위원회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형식적이고 기술적인 설명과 계획만 잔뜩 담겨 있을 뿐이다.
보고서 어디에서도 산업시설과 관련해서 전쟁, 식민화, 노동착취, 강제노동, 원폭 피해 등 역사적이고 사회문화적인 맥락을 찾아볼 수 없다. 일본 본토의 에도를 방어하는 데 산업유산이 큰 역할을 했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정작 그 산업유산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탱하는 중추시설이었다는 인식은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이토록 폐쇄적이며 일국 중심적인 역사·문화 인식 속에서 유네스코가 지향하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대체 어떻게 담지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취한 태도를 볼 때, 위원회의 권고가 제대로 이행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일본 정부는 강제노동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식민지 시기에 민족차별 없이 ‘일본인과 한국인 모두 사이좋게 잘 지냈다’는 일본인의 이야기를 증거라고 제시하면서, 오히려 한국이 역사를 날조하고 있다는 동영상을 만들어 국제사회에 유포하고 있다. 보고서 역시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현장에서 1300km나 떨어진 도쿄에 정보센터를 설립해 산업유산별 ‘전체 역사’를 구성한다 한들, 강제노동을 부정하거나 ‘역사 해석의 차이’라며 ‘물타기’하는 방식을 쓸 것이 너무나 뻔하다.
강제노동을 둘러싼 ‘역사전쟁’은 강제동원 피해자의 권리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이미 한일 간에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온 사안이다. 여기에 산업혁명 시설의 세계유산 등록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추가되며 강제노동의 과오는 국제적 문제로 발전했다. ‘국가주의 강화’라는 프로젝트의 하나로 아베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한 ‘자랑스러운 역사 만들기’가, 국내외 피해자 및 시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뜻하지 않은 암초를 만난 셈이다. 그런 만큼 아베 정부도 국제 여론을 우호적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한국도 여기에 밀리지 않을 만한 대응을 해나갈 필요가 있다. 요컨대 상황을 전체적으로 총괄할 수 있는 컨트롤 타워를 만들어 아베 정부의 총력전에 맞설 수 있는 종합적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칼럼의 내용은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민철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김민철 교수는 일제의 지배정책과 친일, 강제동원피해자, 일본역사 왜곡 등 과거청산문제와 씨름하면서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집행위원장, 한일시민선언실천협의회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과거청산 전문잡지 <역사와책임>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