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 최영애 위원장
사회가 위기에 처할수록, 그리고 민주적인 통치 시스템에 문제가 생길수록 가장 위협받기 쉬운 것이 인권이다. 코로나19가 촉발한 위기 이후 늘어나고 있는 차별과 혐오범죄에서부터 최근 미얀마 군부의 시민 탄압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인권 보호 의무가 상식에 속하는 오늘날에도 우리는 도처에서 인권의 위기를 목격하고 있다. 최영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오늘날 인권이 갖는 의미와 그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 민주국가에서 인권이란 말은 누구나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인권에 대한 인식의 폭이 각자 처한 상황 —성별, 소득, 소수자성 등등— 에 따라 굉장히 넓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이를 고쳐 나가기 위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인권에 대한 정의와 개념, 국민 의식은 사회가 계속 변화하고 발전함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코로나19 위기나 기후변화, 개인정보 유출 등의 사례에서와 같이 과거에는 인권의 영역이라 생각되지 않았던 것들이 점차 인권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 이후 전 세계적으로 혐오와 차별이 중요한 인권문제가 되었고, 재난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의 인권과 개인정보 인권 문제도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인권을 바라볼 때 어느 한쪽 면만이 아니라 다양한 상황과 눈높이에서 전체적인 측면을 제대로 읽어내려는 부단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 지난 20년 동안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의 활동이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간의 활동 중 가장 의미있었던 활동으로는 무엇을 꼽으시겠습니까?
인권위의 설립 자체가 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인권위의 활동 하나하나가 사회를 조금씩 변화시켰고, 무엇보다 인권위의 활동 이후 인권에 대한 국민의 인식과 민감성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높아졌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여러 조사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컨대 2003년 국민인식조사에서 외모 비하 발언을 차별로 본다는 응답은 40%에 머물렀을 정도로 과거 우리 국민들의 일상 속 인권에 대한 인식은 충분히 높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2020년 조사에서는 국민 10명 중 9명이 “누구나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고”, “타인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도 나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며”, “평등을 위한 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응답했습니다. 이러한 국민적 공감대에 힘입어 인권위는 2019년에 혐오차별대응기획단을 만들어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구조적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 지금 말씀하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해소를 위해 인권위는 지난 2006년 한국 정부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했고 지난해에는 평등법 제정도 국회에 요청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부 종교계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반발이 적지 않습니다. 성별·연령·인종·장애·종교·성적 지향·학력 등을 이유로 차별을 금지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원칙이 법안으로 반영되는 데 이토록 힘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평등법에 대한 우려의 상당부분은 법률의 성격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성차별 시정’은 결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성별 고정관념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장애학생의 교육권을 보장한다고 해서 비장애학생의 교육권이 침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지하철역 승강기나 저상버스는 장애인만이 아니라 노약자나 유아동반 보호자,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사람 모두에게도 유용한 것이죠. 따라서 ‘평등법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점을 국민들께 보다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권위는 여러 통로로 사회 각계각층에 평등법의 취지를 설명하는 자리를 갖고 있고, 이렇게 형성한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21대 국회에서 평등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노력을 쏟을 것입니다.
— 작년 4월 전 세계로 코로나19가 확산되던 상황에서 유네스코 국제생명윤리위원회(IBC)와 세계과학기술윤리위원회(COMEST)는 ‘팬데믹 상황에서 취약한 집단에 대한 일체의 언어 및 물리적 낙인과 차별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과 테러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위기 상황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빈번하게 침해받는 것이 인권이기도 한데요. 이를 막기 위해 정부와 시민사회가 노력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지난 2015년 유엔은 ‘자유권규약위원회의 대한민국 제4차 국가보고서에 대한 최종견해’에서 “한국 정부는 혐오발언, 폭력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낙인과 차별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할 것을 권고”한 바 있습니다. 이에 인권위는 우리나라에서 혐오와 차별을 근절하기 위해 국가기관과 시민사회와 더불어 다양한 공동선언과 연구 활동을 해 오고 있습니다. 국가의 공식적인 선언도 중요하지만, 인권이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굳건하게 자리잡기 위해서는 사회 다양한 분야에서 인권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에 교육 분야에서 인권위는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와 함께 ‘교육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혐오와 차별 없는 안전한 학교 만들기’를 약속하는 ‘인권존중 학교를 위한 평등실천, 혐오표현 대응 공동선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미디어를 통한 혐오의 확산을 막는 것도 중요하기에 미디어 종사자들과 함께 ‘혐오표현 반대 미디어 실천 선언’을 발표하고 혐오표현 확산에 대한 자성과 예방을 위한 실천사항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최근 더욱 문제시되고 있는 온라인상의 혐오표현 확산을 막기 위해 카카오 및 한국언론법학회와 더불어 ‘온라인 혐오표현 대응을 위한 공동연구’를 추진했고, 카카오는 그 성과를 바탕으로 혐오표현 대응을 위한 기본 원칙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대응책들은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두 얼굴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효과적인 방역을 위한 방안들이 일정 부분 개인의 자유와 프라이버시와 상충될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요, ‘방역 모범국’인 우리나라의 대응 중 인권 측면에서 잘 된 부분과 보완해야 할 부분에 대해 짚어주실 수 있을까요?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코로나19와 관련해 각국 정부의 긴급조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조치들은 ‘가능한 한 최소 침해적이고 비차별적인 방법으로 적용’되어야 하며 ‘개인에 대한 모니터링도 그 기간과 범위가 제한적이어야 함’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코로나19 대응에 있어 격리와 배제보다는 선제적 검사 등 선진적이고 효과적인 방역 정책을 실시하고 있지만, 확산 초기 대응에 있어서는 확진자 동선의 과도한 공개 등 ‘최소 침해’의 측면에서 혼선을 빚은 일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에 인권위는 방역 정책 및 지침 등이 개인의 기본권 제한과 공익과의 균형성, 피해의 최소성 등에 대한 엄격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고,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가 발간하는 코로나19 관련 보고서와 지침을 번역·보급해 보다 체계적이며 시의적절한 대응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 지난 3월 21일은 세계 인종차별 철폐의 날이었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우리나라는 유네스코와 공동으로 ‘인종주의와 차별 반대 국제 포럼’을 개최했습니다. 그동안 인종차별은 우리와 먼 얘기로 느껴졌습니다만, 코로나19 이후 서구에서 동양인에 대한 차별과 낙인이 발생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마음이 드는 동시에, 우리 사회 안에서도 외국인 노동자 등에 대한 ‘우리 안의 인종차별’을 직시하고 인권감수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절실한 요즘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포럼에서 위원장님께서 패널로 참석하여 발언도 하셨는데요, 이에 대한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특정집단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아니라 인류애와 연대로 이를 함께 헤쳐 나가야 한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포럼이 중요한 의미가 있었고, 특히 이 자리에서 혐오표현에 대응하기 위해 국제인권기구 및 각 국가들과의 국제적 연대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는 점도 큰 소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유네스코가 이러한 포럼을 통해 인종차별 종식을 위한 활동 상황과 더불어 각국의 인종차별 및 혐오표현 대응 성공사례를 알리고, 이를 바탕으로 반차별 방안 및 로드맵 구축 등의 결실을 거두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인터뷰 진행 및 정리 | 과학청년팀, 유네스코뉴스 편집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