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 부대행사 ‘화해와 추모를 위한 유산해석과 해설’
유산에는 그것을 만든 인간이 가진 다양한 측면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따라서 영광스런 찬란한 순간을 그대로 담은 유산이 있는가 하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비극의 흔적을 간직한 유산도 많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외교부와 함께 비극과 아픔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유산을 의미를 살펴보고, 그 해석과 해설을 평화로운 미래를 여는 주춧돌로 삼는 방법을 모색해보기 위한 행사를 열었다.
우리에게 유산이란 무엇인가? 유산은 사람들의 사연과 손길이 새겨진 장소다.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고향, 낯선 여행지, 혹은 아름다운 추억일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비극과 아픈 역사의 현장일 수도 있다. 인간은 이러한 기억들을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기념비나 건물을 세우고, 때로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현재는 기념관이나 추모공원, 박물관 등이 설립되어 역사와 현재의 연결고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유대인 집단 학살의 아픔을 간직하고있는 폴란드 아우슈비츠 집단수용소나 아프리카 노예 무역의 비참한 참상을 떠올리게 해 주는 세네갈의 고레 섬 등,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의 희생자를 추모하며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장소에도 어김없이 박물관이나 추모관이 마련돼 있다.
지난 7월 19일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외교부와 함께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의 부대행사로 개최한 ‘화해와 추모를 위한 유산해석과 해설’(Heritage Interpretation & Presentation for Memorialization & Reconciliation)은 세계 각국의 전쟁과 인종차별, 식민지배 등 ‘부(負)의 유산’과 관련된 박물관들이 어둡고 아픈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평화롭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풀어나가는 방식들을 논의해보고자 기획되었다.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서 남아공의 어두운 역사인 인종분리정책을 주제로 삼고 있는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의 전시 사례를 발표한 유산관광 전문가 타보 마네치(Thabo Manetsi) 박사는 “부끄러운 역사라도 투명하게 공개하고 후속세대가 평화롭게 논의하도록 하는 것이 상호 이해와 화해의 중요한 시작”이라고 말하며 올바른 해설과 해석의 역할을 강조했다.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대만국립대학교의 슈메이황 교수는 대만국립대학교 부속 박물관에서 진행한 대만 원주민 유물 해석 사례를 통해 “유산이 가진 기억을 긍정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진정성 있는 대화와 협력이 필수적”이라며, 유산해석과 해설은 원주민 공동체와의 대화 과정을 통해 과거에 대해 배우고 평화를 증진시키는 과정이라 주장했다. 이어서 마지막 발제를 맡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문화유산센터의 이현경 교수는 ‘한 사건이나 유산에 대해 서로 다른 주체가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목소리와 가치에 대한 존중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전진성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문화팀장이 좌장을 맡아 진행된 토론에서는 세 명의 발제자와 더불어 필리핀 산토토마스대학교의 에릭 제루도 교수와 영국 켄트대학교의 소피아 라바디 교수가 참여했다. 에릭 제루도 교수는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21년 통치 기간 동안 독재에 맞서 싸운 사람들을 기리는 곳인 ‘반타욕 응므가 바야니’(Bantayog ng mga Bayani)의 사례를 예로 들며 현 시대의 젊은이들이 경험해보지 못해 직접적인 기억이 없는 당시의 역사와 젊은이들을 연결해주는 가교로서 유산해석과 해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소피아 라바디 교수는 유산 해석 과정은 그저 선택된 이야기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개개인의 이야기처럼 덜 정치적이면서도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발굴해 소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역사학자 헤이든 화이트는 “사료(史料)란 역사가의 메타적 기획으로 선택되고 상상력으로 가공된 제한적 사실(史實)”이라며 소위 말하는 ‘다수의 학자가 인정하는 역사, 국가에 의해서 선택된 역사’가 아닌, 하나하나의 기억이 갖고 있는 역사의 가치를 설파한 바 있다. 이번 부대행사를 통해 여러 전문가의 발제와 토론을 들으며, 유산은 ‘여러 사람이 각각 다른 감정으로 써내려간 위대한 서사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거대한 서사시의 행간에는 저마다 서로 다른 의미가 담겨 있고, 그래서 유산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유산을 해석하고 해설하는 일이란 바로 이러한 행간에 숨어있는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아닐까.
장자현 문화팀 전문관